종말론은 왜 이렇게 무서울까? 요한계시록이 남긴 오해와 진실
불안과 열광 사이에 선 종말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사람들의 표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손사래를 치며 “그런 얘기 하지 마요”라고 말하는 이들, 둘째는 흥미로워하며 귀를 쫑긋 세우는 이들, 그리고 셋째는 “이단인가요?” 하고 경계하는 이들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종말이라는 주제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편입니다. 대형 사이비 종교의 폐해로 인해 “종말론=위험한 집단의 논리”라는 인식이 깊이 자리 잡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질문해봐야 합니다. 종말론은 정말로 위험한 사상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워했던 것일까요?
사람들이 종말론을 불편해하거나 두려워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사이비 종말론 집단이 남긴 상처가 있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죽음이나 파괴를 연상케 하는 '종말'이라는 단어 자체가 막연한 공포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일부 신자들은 종말론에 과도하게 몰입하며 열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현재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날 출구로서 '종말'을 기대하고, 어떤 경우에는 종말적 사건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긴박감을 퍼뜨리며 주변을 설득하려 듭니다.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정의의 회복', '악인의 심판', '내가 고통받는 이 현실의 끝'을 향한 갈망이 존재합니다.
종말론은 이렇게 불안과 열광이라는 서로 다른 반응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주제입니다. 그만큼 인간의 가장 깊은 질문들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금의 고통과 악은 정말로 끝나는 날이 올까? 하나님은 정말로 세상을 새롭게 하실까?
사실,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 전체의 이야기 구조를 이해하는 데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핵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는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도 꺼내기 부담스러운 영역으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그 난해함과 상징성 때문에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나는 책”처럼 여겨졌지요.
그러나 지금 이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종말론에 대해 지나친 환상도, 불필요한 공포도 아닌, 신앙적으로 건강하고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이해를 함께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종말론(eschatology)'이이란 무엇인가
신학적으로 ‘종말론’은 에스카톨로지(eschatology)라는 용어로 불립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에스카토스(ἔσχατος, eschatos)’에서 비롯된 말로, ‘마지막’, ‘끝’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학문’을 의미하는 ‘-로지(logy)’가 붙어 “마지막 일들에 대한 신학적 탐구”라는 뜻이 됩니다. 이 용어는 이후 라틴어 에스카톨로지아(eschatologia)로 전해졌고, 중세 유럽의 신학과 철학을 거쳐 근대 독일 신학자들에 의해 조직신학의 한 분과로 정립되면서 현재의 ‘종말론’이라는 신학적 의미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인간의 시작, 즉 창조와 기원에 대한 학문적 탐구는 ‘코스모로지(cosmology)’ 혹은 ‘테올로지(theology)’와 함께 논의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신학 내에서 ‘창조론(Creation theology)’은 비교적 안정된 교리 체계로 정착된 반면, 종말론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낳으며 더욱 동적인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시작보다 끝에 더 많은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종말론은 단순히 ‘세상이 언제 망하느냐’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어떻게 마무리되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종말론은 단지 ‘끝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끝을 향한 준비와 소망의 신학입니다.
성경은 여러 부분에서 종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에서는 다니엘서가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핵심을 담고 있으며, 이사야서나 스가랴서에도 종말적 회복에 대한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종말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셨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과 베드로후서 3장 등에서도 종말과 재림에 대한 중요한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요한계시록은 이 모든 흐름을 총체적으로 묶어내는 책으로서, 종말이라는 주제를 가장 깊이 있게 다룬 문서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신약성경 안에서도 가장 해석이 분분한 책 중 하나이며, 초신자들에게는 접근조차 어려운 책으로 여겨집니다. 왜 그럴까요??
요한계시록, 왜 이렇게 해석이 갈릴까?
요한계시록은 분명히 ‘계시’(하나님의 드러남)인데, 왜 그토록 어렵게 느껴질까요? 이는 이 책이 가진 몇 가지 독특한 특성 때문입니다.
첫째, 문체와 장르의 독특성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이라는 장르에 속합니다. 묵시문학은 상징과 환상, 숫자,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문학 형식으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짐승의 수 666’이나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같은 표현은 문자적으로 읽으면 도무지 현실과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둘째, 숫자와 상징의 반복입니다.
요한은 숫자 ‘7’을 유독 자주 사용합니다. 일곱 교회, 일곱 영, 일곱 금촛대,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등. 이는 단순히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익숙했던 상징체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7’은 완전함과 하나님의 질서를 의미하는 숫자였기 때문에, 요한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심판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셋째, 요한 개인의 신학적 색채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통해 매우 일관된 신학적 색깔을 보여줍니다. 그는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진리와 거짓’과 같은 대조적 개념을 선호하며, 그 대립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강조합니다. 또한 그는 그 어떤 복음서 저자보다도 상징적 언어에 능숙하며, 세상의 이면을 꿰뚫는 ‘영적 통찰’을 담아냅니다. 따라서 그의 계시는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세상의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말은 두려움이 아닌 회복의 시작
우리는 종말이라는 단어에 ‘끝’이라는 이미지를 씌우기 쉽지만,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회복과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과 함께 거하시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눈물이 없고, 죽음도 없고, 애통도 없는 그 세계는 종말의 파괴가 아닌, 하나님의 회복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종말론은 결국 두려움의 주제가 아니라, 신앙의 최종적 소망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우리가 이 시리즈를 통해 그 빛을 함께 따라가보기를 소망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종말 관련 본문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를 네 가지 관점(과거주의, 역사주의, 미래주의, 이상주의)을 통해 비교해보려 합니다. 동일한 본문이라도 어떻게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오는지, 그리고 그 차이가 우리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기다리는 폴(Paul of Await)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