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주의 종말론은 한국 선교를 어떻게 바꿔놓았나?

선교의 신학, 신학의 선교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선교 방식과 목회 전략에는 오랜 시간 쌓여온 신학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세대주의 전천년설에 기반한 종말 신학은 단지 미래에 대한 믿음의 형태를 넘어서, 복음 전도와 교회 성장의 방향성, 심지어 사회와의 관계 설정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 개화기부터 시작된 한국 개신교 선교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 중심에 있었던 선교사들의 종말론적 신학이 한국 선교의 정체성을 어떻게 빚어왔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특히 최근 선교학계의 다양한 연구와 사료 분석을 참고하여, ‘세대주의’가 한국 교회에 준 장점과 동시에 남긴 숙제를 함께 조망해보겠습니다.


조선 개화기부터 현재까지, 세대주의 종말론이 한국 개신교 선교에 끼친 영향과 그 긴장, 그리고 현대 선교의 방향성을 탐구한 '깨어 기다리는 삶 : Awake and Await' 블로그 글의 썸네일 이미지 입니다.

조선 땅에 들어온 세대주의의 씨앗


19세기 말 조선에 도착한 미국 선교사들은 대부분 복음주의 계열의 장로교 및 감리교 배경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대 미국 복음주의의 흐름 속에서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의 세대주의 전천년설사이러스 스코필드(Cyrus I. Scofield)의 주석 성경을 접하고, 성경을 종말 예언 중심으로 읽는 관점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다비교회를 세대(dispensation)별로 구분하여 하나님이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교제하신다고 주장했고, 스코필드는 그의 신학을 성경 본문 옆에 체계적으로 정리해 '예언의 시계표'로 만든 인물입니다. 스코필드 주석 성경은 무디 출판사(Moody Press)의 지원과 함께 미국 전역의 복음주의 교회에서 표준 교재처럼 사용되었고, 선교사 후보생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습니다. 결국 이 주석 성경은 신학교육의 교과서였고, 이 교육을 받은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발을 디딘 것입니다.


대표적인 선교사로는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헨리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Scranton) 등이 있으며, 이들은 미국 복음주의 선교단체의 파송을 받아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한국 사회가 미신과 가난, 유교적 억압 아래 고통받고 있다고 보았고,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다는 신념 아래 복음을 속히 전하여 가능한 많은 이들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 사역의 핵심이라 여겼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갑신정변(1884), 갑오개혁(1894), 동학농민운동(1894), 을사늑약(1905) 등 연속된 정치·사회적 격동기 속에 있었습니다. 지배층은 무너지고 민중의 혼란은 깊어졌으며, 조선의 문호는 외세에 의해 점차 개방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곧 오실 예수님'이라는 메시지는 민중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었고, 선교사들에게는 사명의 긴박함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 개신교는 초기부터 '말씀 중심', '전도 중심'의 선교 모델을 형성하게 되었고, 교육이나 의료, 복지 같은 분야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는 유럽계 선교사들이 보여준 '사회 개혁과 복음의 통합'이라는 접근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미국 복음주의 선교사들의 성경 해석 방식과 종말론적 시야는 결국 한국 교회에 속도, 숫자, 회개, 재림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선교 문화를 형성하게 만들었습니다.




복음 전도 vs 사회적 책임의 긴장감


세대주의 선교사들은 '지금은 말세의 때'라는 인식을 공유하며, 복음 전파가 끝나야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이 신념은 마태복음 24장 14절“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며,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한 결과였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복음 전파가 전 세계적으로 완수되어야 가능하다는 이해는 당시 선교 열정의 불을 붙였고, 선교는 ‘속히’, ‘넓게’ 퍼져야 한다는 목표 아래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 ‘속도와 확산’의 논리가 더욱 강하게 작동했습니다. 한국인의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 그리고 당시의 격동하는 역사적 상황(일제 강점기, 전쟁, 분단 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계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곧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체감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자들은 더 이상 이 땅에 희망을 두기보다는, 오실 예수님과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는 방향으로 종말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는 선교사들의 종말론적 메시지와 정서적으로도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복음 전도의 열정은 뜨거웠지만, 사회 구조나 제도에 대한 개혁은 상대적으로 소홀해지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와 병원, 고아원 등의 설립은 선교사들의 손에 의해 활발히 이루어졌지만, 이는 종말론적 긴박감 속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구조적 개혁이나 정의 실현은 이 세상이 곧 심판받고 사라질 것이라는 전제 아래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이론이 오랜 세월 동안 한국 사회에서 지속될 수 있었을까요? 단지 종말의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결국 완성될 것이며, 지금의 눈물과 희생이 헛되지 않다는 위로의 메시지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즉, 비관적 예언이 아니라 궁극적 회복의 확신으로서 종말론이 기능했던 것입니다. 이 신학은 ‘이 땅은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온다’는 이원론적 구도 안에서, 고난 속 신자들에게 ‘희망 있는 떠남’을 준비하게 해준 것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세대주의 종말론은 단순히 종말을 예측하는 학문이 아니라, 그 시대를 견디게 해준 영적 서사였던 셈입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서, 현실을 바꾸려는 사회개혁적 감수성은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계속되는 영향력과 과제


세대주의 종말론이 한국 선교에 준 영향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교지에서도 여전히 "복음 전파가 우선"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교회 성장과 숫자 중심의 접근 방식이 선교 전략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선교사가 지역사회와 깊이 연대하기보다는 빠르게 교회를 개척하고, 자립시킨 후 철수하는 방식도 세대주의의 영향 아래 형성된 모델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실적 중심, 보고서 중심의 문화와 맞물려 현실적으로 강화되기도 했습니다. 일부 선교사들은 실제로 자신이 파송된 국가나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교회를 세웠고, 몇 명을 세례 주었으며, 몇 명의 현지 지도자를 훈련시켰는지를 구체적으로 보고하지 않으면 후원이 중단될까 두려워하며 사역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선교의 진정성과 장기적 지속 가능성보다 단기적 성과와 가시적인 숫자를 우선시하는 풍토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종종 선교지를 하나의 '미션 완료 대상'처럼 간주하게 만드는 문제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의 일부 대형 교회나 선교 단체는 자신들의 '세계적 영향력'을 입증하기 위해 다수의 선교사를 여러 나라에 파송하고, 연례보고서나 교회 홈페이지, 선교 주일 행사 등을 통해 이를 홍보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작 선교 현지의 문화적 뿌리, 지속가능한 돌봄 구조, 선교사와 지역민 간의 진정한 동행이 소홀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종말론적 긴박감과 숫자 중심 보고 체계가 결합하면서, '빠르게 복음을 심고 떠나는' 선교 문화가 형성된 것이죠.


그러나 현대의 선교학은 이제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선교학계는 단지 종말을 준비하기 위한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부분적으로 구현하는 '전체적 선교(holistic mission)'의 중요성을 점점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육과 복지, 정의와 창조세계 돌봄, 문화와 예술을 통한 복음의 확산 등, 보다 포괄적인 선교 이해가 확산되고 있으며, 단지 ‘파송과 복음 선포’만이 아닌 '지역사회 안에 함께 살아가는 선교'를 향한 재해석이 진행 중입니다.


그렇다면 세대주의 종말론은 과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요? 그 답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신학이 한국 교회의 선교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긍정적 열정과 함께, 숙고가 필요한 그림자도 남겼다는 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맞는 종말 신앙, 그리고 선교 전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다음 편에서 계속 함께 고민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여정은 이제 한층 더 넓은 지형으로 확장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세대주의 종말론이 단지 선교의 방식뿐 아니라 정치와 국제관계의 영역, 특히 '친이스라엘' 정서와 크리스천 시오니즘이라는 형태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단지 교회 안의 신학적 논쟁이 아니라, 세계 정치와도 얽히는 이 복잡한 실타래 속에서, 과연 우리는 종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많은 기대와 함께, 다음 편도 꼭 함께해 주세요.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기다리는 폴(Paul of Await)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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