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왜 이스라엘을 지지할까? 종말론이 만든 정치 신학의 진실
신학이 외교를 만든다?
‘기독교와 정치’라는 주제를 꺼낼 때면 많은 사람들이 민감해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때 오직 내면의 신앙과 천상의 나라만을 말하던 종말 신학이 이제는 외교 정책과 국제 관계의 주요한 배경 논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뜻을 외교로 실현한다’는 신념이 일부 신자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으며, 이는 곧 종교적 신념이 정치적 입장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그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기독교 내 친이스라엘 정서’입니다.
한국과 미국 등 일부 개신교 진영에서는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라는 말이 마치 신앙적 격언처럼 회자되곤 합니다. 성경 구절 중 창세기 12장 3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는 구절은 지금의 이스라엘 국가에 적용되며, 그 나라를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이 신념의 배경에는 단순한 정치적 동맹이나 지정학적 이익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세대주의 전천년설에서 파생된 종말론적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성경의 모든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믿고, 그중 핵심은 예루살렘의 회복과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단지 종교적 믿음의 영역을 넘어, 정치적 지지와 정책 결정, 외교적 관계까지 영향을 미치는 구조로 확장되어 왔습니다. 특히 미국 복음주의 진영에서 이 사상은 정치화되어 강력한 로비 네트워크로 작동하고 있으며, 한국 교회 역시 이 흐름을 받아들여 ‘이스라엘 지지’가 신앙의 실천처럼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왜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 유독 강한 신앙적 애착을 보이는지, 그 배경에 있는 종말 신학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이 미국과 한국 정치에까지 어떻게 영향을 끼쳐왔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크리스천 시오니즘이란 무엇인가?
‘크리스천 시오니즘(Christian Zionism)’은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이 지금의 국가 이스라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믿는 신앙적 태도를 말합니다. 이 관점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약속’—특히 민수기 24장 9절의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와 시편 122편 6절의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등의 구절을 현대 이스라엘 국가에 적용하며, 이 국가를 축복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라는 논리를 펼칩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이 사상의 신학적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 곧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 교회 시대에도 유효하며 문자 그대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교회와 이스라엘은 구속사에서 별개의 존재로 간주되며, 종말의 시나리오 안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은 중요한 전제 조건이 됩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의 등장을 성전 재건 이후로 연결하고, 다니엘서 9장의 ‘일흔 이레’ 예언을 현대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과 결부시키며, 1948년 이스라엘 독립을 ‘말세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시점’으로 해석합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이 다시 유대인의 통제 아래 들어오고, 세 번째 성전이 재건되며, 모든 유대인이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하는 일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져야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종말 사건들이 개시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해석은 단지 신앙의 내면에 머무르지 않고, 국제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강한 신학적 동기로 작용해왔습니다.
미국 복음주의와 이스라엘: 신학이 정치로 이어질 때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는 이 종말론을 정치적으로 확장시킨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20세기 중반부터 세대주의를 수용한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을 성경적 중심 국가로 보았고,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 1967년 6일 전쟁에서의 승리를 ‘예언 성취’로 해석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사야서 66장 8절—“어찌 그리 한 순간에 나라가 태어나겠느냐?”—와 연결짓기도 했고, 유대인의 귀환을 에스겔서 36~37장에 나오는 ‘마른 뼈가 살아나는 환상’과 병행해 해석했습니다. 이러한 성경적 상상력은 곧 이스라엘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중동 외교에서 기독교적 색채를 지닌 강력한 정치 로비로 발전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제리 폴웰(Jerry Falwell)과 존 해기(John Hagee) 같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폴웰은 1979년 미국 보수 기독교 연합체인 ‘도덕 다수(Moral Majority)’를 창립해 정치와 신앙을 결합한 보수적 아젠다를 제시했으며, 이스라엘 지지 문제를 기독교의 도덕적 책임으로 주장했습니다. 존 해기는 ‘크리스천 연합을 위한 이스라엘(The Christians United for Israel, CUFI)’이라는 단체를 설립하고 매년 수천 명의 미국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이스라엘 지지 집회를 조직하며, ‘이스라엘을 축복하지 않는 나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한 결정은 단지 외교적 상징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이 조치를 하나의 ‘예언 성취적 행동’으로 해석했고, 이는 크리스천 시오니스트들의 오랜 요청과 정치 로비의 결과로도 이해됩니다.
물론 제러드 쿠슈너(트럼프 대통령의 사위)가 유대계라는 사실도 작용했을 거라는 의견도 많지만, 복음주의 정치 세력의 지지 확보가 이 결정을 강하게 밀어붙인 또 다른 배경이었다는 점에서, 시오니즘과의 관계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유세 과정에서도 수차례 “나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친구”라고 선언하며 보수 복음주의 지지층을 결집시킨 바 있습니다.
이처럼 미국 내 ‘기독교 시온주의 로비’는 오늘날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미국 대통령들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하거나, 이스라엘을 향한 군사적·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데에도 분명한 배경 논리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이해하는 것은 단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이 어떻게 세계 정치에까지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이기도 합니다.
한국 개신교의 수용과 열정
한국 교회는 미국 복음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으며 세대주의 신학과 함께 ‘친이스라엘 정서’를 수용하게 됩니다. 1990년대 이후, 이스라엘 성지순례 붐과 더불어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하라”는 구호가 교회 곳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고, 이스라엘 국기를 강단에 걸거나 이스라엘을 위한 특별 헌금을 드리는 교회도 등장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스라엘을 향해 보여주는 애정은 단순한 문화 수용이나 외교적 동조를 넘어, 종말 신앙의 실천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려면 먼저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한국 교회 안에서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고,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이 곧 나와 우리 교회를 축복하는 길’이라는 확신은 ‘축복의 통로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신학적 구조로 작동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신학적 반론도 존재합니다. 유대 민족에 대한 약속이 신약에서 교회 공동체로 확대되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이스라엘 절대주의’가 성경의 구속사적 흐름과는 어긋난다는 비판을 제기합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오히려 현대 중동 분쟁의 정치적 복잡성과 인간적 고통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축복인가, 왜곡된 해석인가?
‘친이스라엘 정서’는 단지 정치 외교의 전략이 아니라, 오랜 종말 신학이 만들어낸 신앙의 문화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시각을 담고 있는지, 아니면 인간의 해석을 신학으로 포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과연 성경이 말하는 ‘이스라엘’을 국가적 개념으로만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신앙과 국제정세, 신학과 외교 사이에서, 기독교는 언제나 균형 있는 눈과 겸손한 태도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종말론적 신학이 한국 사회 내부 정치에까지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다룰 예정입니다. 특히 보수 기독교 진영과 정치권의 연대 양상 속에서, 신앙이 어떻게 정치적 입장과 맞물려 움직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세대주의 종말론’이 정치적 태도와 결합할 때 생겨나는 이점과 한계를 함께 분석해보려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종말론에 대한 신학적 비판과 대안적 관점, 곧 ‘건강한 종말 신학’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도 함께 모색해 보게 될 것입니다. 단지 종말의 시기나 이스라엘을 둘러싼 해석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깨어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더 본질적이고 실천적인 질문으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흥미로우셨다면,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기다리는 폴(Paul of Await) 드림 💖